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데이비드 흄 (문단 편집) === 윤리학 === 흄의 회의론은 극단적인 생각을 배제하는 '겸손의 회의주의'이다. 인간의 이성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증명할 수 있다는 독단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의 이성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데카르트]]가 말한 이성의 '확신'은 경험론자인 흄에 있어서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건 자신의 생각이 틀렸을 가능성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흄의 도덕관은 양극단 사이에서의 도덕을 말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동음이의어)#서양철학에서의 중용|중용]]과 비슷하다. 극단이란 일종의 '확신'이고, 중용이란 그 극단을 피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흄은, 인간의 삶이 '이성의 확신'으로 통제되어야 한다는 데카르트식 도덕관은, 연민이라고는 전혀 없는 염세주의적 철학이라고 간주한다. 흄에게 있어서 도덕은, '이성'적 확신에서 나오는 도덕 행위가 아니라 '감정'(정념)에 좌우되는 도덕 행위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의 도덕관은, 모든 선악 판단의 기초가 감정이 된다. 하지만 그것은 감정에 따라 임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그 감정이 유발하는 '유용성'에 달려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타인의 비겁함, 불의, 자만은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성질을 보이는 이들에게 반감을 느끼고 그들을 악하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용기, 정의, 겸손은 사람들에게 이득이 되므로 우리는 그러한 성질을 보이는 이들에게 호의를 느끼고 그들을 선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선악 판단은 대상에 대한 감정이 자신이나 타인에게 유용한가, 받아들일 만한가에 달려있다. 그리고 도덕은 사회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도덕을 논할 때 다루는 감정은 타인에게 감정을 충분히 전달될 수 있는 '공감'의 감정으로 한정된다. 여기서 말하는 공감의 감정이란 타인에 대한 '감정이입'이 될 수 있는 감정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남이 슬플 때 내가 슬퍼진다면 그 슬픔의 감정은 도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기쁨도 상대에게 공감될 수 있다면, 그 기쁨의 감정은 도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슬퍼하는데 그것이 타인에게는 아무런 공감도 유발하지 않는다면 그 슬픔의 감정은 도덕적인 역할을 할 수 없다. 즉, '공감'될 수 있는 감정에 한에서, 우리는 그 감정의 도덕적 유용함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판단은 그 사회의 "일반적인 관점"(general point of view)을 기준으로 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일관성 있는 도덕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안정되고 고정된 관점"을 가리키며, 또한 그것은 "어떤 감정이나 행동의 유용성에 대한 오랜 세월에 걸친 경험을 통해 수립된 것"이다.[* 어떤 감정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그 사회의 관습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윤리의 바탕으로 삼기에 인간의 '감정'이란 별로 탄탄해 보이지 않지만, 흄은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흄의 철학에 따르면, 이성적 추론은 물론이거니와 경험적 사실로부터도 도덕의 당위는 이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흄에게 있어서, '경험적 사실'은 귀납법으로 단지 지식을 얻는 데에, 보다 더 유용할 뿐이다. '도덕적 당위'를 발견하는 데에는 경험적 사실이나 이성적 추론 모두 적당하지 않다고 흄은 생각했다.] 따라서 부득불 '''감정에 대한 유용성'''만이 모든 도덕적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다만 윤리에 있어서 이성에게도 유일한 효용은 있다. 도덕적 공감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를 '확인'해주는 작용과 도덕적 공감이 전혀 다른 감정이나 잘못된 믿음으로 가는 것을 '보정'해주는 작용이, 이성의 역할에 해당한다. 여기서 흄은 이성을 부정했던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흄은 이성 전부를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흄은 지식의 토대로서의 이성은 무기력하지만, 우리가 세계를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도구로서의 이성은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조차 완벽하진 않겠지만, 이성을 사용함으로써 더 큰 안정성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대가 달라지고 장소가 달라지면 유용한 것에 대한 감정들이 달라지기 때문에, 도덕과 관습에 일반적인 법칙을 세우기 어렵다는 흄의 논리는 '도덕적 다원주의'로 이어진다. 좋은 삶을 사는 데 필요한 것은 여러 가지이며, 하나의 삶이나 한 사회가 그것들을 다 가질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사야 벌린]]이 1960년대에 '소극적 자유' 개념을 들고 나와 도덕적 다원주의를 주장한 철학적 바탕이 되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